하이델베르크

독일 남부의 하이델베르크는 라인강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대학(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3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이 있는 교육의 도시, 철학의 도시이며 관광의 도시입니다.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강변 주변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주택과 건물 그리고 유구한 역사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골목마다 느낄 수 있는 차분함과 기품이 넘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성에서 바라보는 도시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으로 루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으로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내려다 보면 시내 중심에 보이는 교회가 루터로 인하여 개혁교회가 된 ‘성령교회(Church of the Holy Spirit)’ 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중요한 4대 논쟁이 있는데 먼저 소속된 수도회의 요청으로 행한 진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 1518.4.26)’, 가톨릭과 라이프치히에서 연옥교리,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교황의 권위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인 역사적 사건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er Disputation 1519.6.27∼7.16)’,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서로 만나지 않았지만, 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de libero arbitrio 1524~1525)’,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성찬 문제에 관한 ‘마르부르크 논쟁(Marburger Religionsgesprach 1529)’을 말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내건 95개조 면죄부 반박 논제를 붙인지 6개월 만에 교황청(교황 레오 10세)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장을 통해 95조에서 말하려는 루터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했고, 루터에게 토론을 청했기에 루터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당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과 몇몇 교수들 그리고 많지 않은 학생들이 함께 열띤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게된 신학적 문제(28항)과 철학적 문제(12항)로 나누어 총 40개 항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두 가지 오류를 수정했는데 하나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는 무가치하다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입니다. 루터의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1518년 하이델베르크 토론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후일 독일 남서부 지방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슈트라스부르(Strassburg)의 종교개혁자로 부상한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1.11~1551.2.28)’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루터의 답변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에는 루터가 옳다며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소속의 신부였고,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본부에 지시를 내려 “루터라는 자가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어 우려되니 입을 다물게 하라!”고 했지만, 답변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루터의 신학적 견해가 옳다고 오히려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고, 하이델베르크 시내 중심에 있는 성령교회(Church of the Holy Spirit)는 이때부터 루터 편에 가세하여 지금의 개신교회로 남아 도시의 중심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 내외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교회 건물 차제도 개혁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겨 주었습니다.

중세 후기에는 독일에는 네 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Augustinereremiten) 가 4개 지역으로 나뉘어 ‘바이에른 지역, 라인-슈바벤 지역, 쾰른 지역, 작센-튀링겐 지역’ 있었습니다. 그런데 14~15세기에 다른 탁발수도회(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시스 수도회)에 개혁 바람이 불게 되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도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수도사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철저히 따라 개인 재산을 배제하고 수도회의 공동체적 삶을 살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이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 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Die observanten Augustinerklöster)가 생겨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 엄수파 수도회는 기존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엄수파 수도회의 연합체인 ‘수도원 개혁 연합회’(Reformkongragation)를 구성하였는데, 이 엄수파 수도회의 총대리 신부가 루터의 스승인 ‘요한 폰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ca. 1460-1524.12.28)’ 였으며 루터는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지옥에 빠졌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수 세기에 걸친 불타오르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뒤에는 위대한 스승과 함께해주는 동료와 협력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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