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안 됩니다. 결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늙은 종 엘르에셀을 보내며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24: 4)라고 합니다. 고향은 그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갈대아 우르’(11:28) 일텐데 그곳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나 나와 도착했던 ‘메소포타미아 하란’을 말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갈대아 우르라는 떠나 나와 도착한 하란에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출발하지만 따라오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남겨진 아브라함의 친인척들이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르에셀은 “며느님이 되실 여인이 저를 따라오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주인 어른의 아드님을 데리고, 주인께서 나오신 그 고향으로 가야 합니까?”(창24: 5 새번역)라는 질문에 아브라함은 “절대로 나의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아라.”(창24: 6 새번역/ MSG, “Oh no. Never. By no means are you to take my son back there.)고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는 그 땅 갈대아 우르와 하란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 하란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그곳을 그리워 하지도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갈대아 우르는 더 이상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떠나므로 본어게인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의 고향은 옛 삶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 현장입니다. 삭게오에게 있어서 주님이 이름을 불어주신 뽕나무처럼, 신앙은 불신의 삶의 과거를 뒤돌아보지도 뒤 돌아 서지도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옛 삶을 그리워하는 나와 우리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34장 1절에 야곱의 외동딸 디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을 잊어 버리고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러 나갔다”의 원어적 의미는 ‘배우고 즐기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치욕과 오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욥의 자녀들처럼 먹고 마시는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또한 압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절대 안 됩니다. 결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떠나온 불신의 자리를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가족 누구도 그 근처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떠나온 불신의 자리를 여전히 기웃거리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교 준비하다가 끄적끄적 아브라함 같은 부모의 부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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