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내일이 보이지 않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조차 없는 위기를 가운데 살 소망까지도 사라져 갈 때 인간이 내는 신음“하나님, 제발 좀 살려주세요”, “이 문제만 해결되면 믿음으로 잘 살겠습니다!”라고 서원합니다. 문제는 그다음 기도의 응답으로 위기를 넘긴 이후에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 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에 응답하셨고, 서원에 대한 대가로 ‘동행, 보호, 공급, 회복’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찌 보면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늘 그래 오셨듯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 야곱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켰나요?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 20~22)
1.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 이삭의 부탁한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창 28:1)라는 의미는 우상 숭배자는 안된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는 우상 숭배자인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 수일 같이+7년의 세월을 보내고, 가족 부양을 위해 돈 버는 데 6년을 더 보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되어 돌아오지만 ‘벧엘’이 아닌 ‘세겜’에 정착해 십여 년의 세월을 더 허비하지만, 그의 가정에서 우상이 청산된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벧엘에서 돌기둥을 세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그 성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부의 상당 퍼센트가 에서에게 뇌물로 주어졌으며 벧엘에서 돌기둥으로 세운 그 돌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애써 외면하고, 세겜에서 최소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한 번도 벧엘에 찾아간 일이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가 서원을 갚았다!? “그가 30여 년 만에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지 않았느냐?” (창 35:7)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어지는 정황들을 보면 과연 그것이 서원을 이행한 것이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겜(창33:18-34:31절)-벧엘(창35:1-15절)-베들레헴 에브랏(창35:16~20절)-헤브론 기럇 아르바(창35:27~29절)-브엘세바(창46:1~4절)-애굽 고센땅 정착(창46:5~)’ 결국 애굽까지 내려갑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에 땅인데 그 땅에 그가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있을까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성전을 세우지도 않는 그 땅이 그를 토해낸 것은 아니지…,???
3.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한 흔적도 없어 보이고??? 야곱을 변호하는 친절한 학자들은 그가 벧엘에 세운 제단에서 드려진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고 합니다(창 35:1-7). 그렇다면 최소한 580 번제는 드렸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그러나 그가 그리 오래 벧엘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해석으로 보일 뿐입니다. 십일조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겸손한 신앙 고백의 행위지만 하나님께가 아닌 에서에게 준비하여 조공에 가까운 선물을 포장한 뇌물로 바친 580여 마리(암염소 200마리와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와 숫양 20마리, 젖이 나는 암낙타 30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40마리와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숫나귀 10마리..,)의 가축들(창 32: 13~15)이 오히려 십일조처럼 보이는 것은 야곱을 깎아내리려는 문외한 목사의 기분 탓일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하지만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연애하는 14년, 돈 버는 6년 고향도 벧엘도 아닌 낯선 땅 세겜에 가서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삭에게도 찾아가지 않았고, 딸 디나 강간 사건과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선을 넘는 관계, 시므온과 레위는 공범이 되어 살인죄를 짓게 되어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며(창 49:5-7),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징계인가 아니면 자신이 자초한 일인가요?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사건이 과연 징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성난 바다에 뛰어들고 죽을 뻔한 위기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와 “하나님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울부짖는다면 우리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고도 그것을 감사하거나 보답할 줄도 위급할 때는 오두방정을 떨다가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평안이 찾아오면 그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는 망각의 사람입니다.
얍복강에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살기 위해 가족만 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떨어져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는 울며 절며 간구하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문제앞에 울고, 해결되면 벧엘을 잊고 아집과 교만가운데 살아가는 …, 세겜에서 벌어지고 겪은 사건은 잠자는 그의 영혼을 깨어내고 잊어버렸던 벧엘을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시편 119편 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자기 식구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거기서 나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창 35: 1~3)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진정 회개하고 그의 생활은 변한 것일까요??
결론은 험악한 세월을 살고 싶지 않으면 “벧엘로 올라가자!” 그리고 ”이본주의 야곱(Jacob)처럼 살 것이 아니라 신본주의 이스라엘(Israel)로 살자!”입니다. 파스칼이 한 말을 인용하고 글을 마칩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씁니다”
*설교 시간에 할 수 없는 극히 개인적 생각을 이곳에 끄적끄적
* Francesco Hayez – 에서와 야곱의 화해 Reconciliation of Esau with Jacob, 1844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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